고려의 충신 가문이였으나 타락해버린 가문
행주 기씨는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와 함께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가중 하나다.
이들은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고려역사에선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좌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기언(奇言)을 시작으로
무신정권때는 최충헌으로 부터 상장군 직위를 받아 기윤위와 기윤숙이 이장대의 난을 진압하고 고려의 대여진 방어선을 맡는등 전형적인 군벌귀족의 모습을 보인다.
무신정권에서 얻은 막대한 영향력 덕분에 행주 기씨 6세손 기자오 또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할수있었다.
비록 음서로 얻은 벼슬이지만 기자오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있었고 1290년, 카다안의 침공이 있었을때 선봉에 서며 여러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선주(평안북도 선천군) 지방관으로 임명됐을때도 성품이 관대하고 온후하여 청탁을 멀리하고 사치를 부리지않아 인사이동의 시기가 찾아오자 선주의 백성들이 떠나지 말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 출세와 폭정의 시작
기자오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이중 막내딸이 원 혜종의 제2황후로 발탁되어 행주 기씨는 고려와 원나라 양쪽에서 막대한 권력을 받게된다.
권신이 된 행주 기씨 7세손 기철은 이런 권력을 자신의 재산과 안위를 위해 사용하고 심지어 당시 고려의 왕 충혜왕을 폐위시킬수도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오만해진 기철 일가는 원나라를 등에업고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패악질을 부리기 시작한다.
기철은 충목왕때 고려를 개혁하기위해 설치한 정치도감을 무력화하고 정동행성을 통해 조정의 운영에 간섭하며 여러차례 방해하기도 한다.
기황후 또한 원나라에서 자신의 입지와 권력을 위해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며 사실상 약탈을 벌였고 고려 조정의 정책에도 사사로이 시비를 걸어댔다.
– 몰락과 최후
하지만 31대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영원할것만 같았던 권력도 끝이 보인다.
평소 반원 정책을 추진하려했던 공민왕은 기철과 친원파를 눈엣가시로 여기고있었는데
마침 원나라의 쇠락과 기철이 쌍성총관부에서 난을 일으키려한다는 첩보를 접수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공민왕 5년(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은 철퇴를 맞아 죽고 그의 지지세력과 친원파또한 모조리 숙청당하며
기철일가와 그의 사위, 손자, 며느리 등 가리지 않고 전부 처형당하였고 기철의 시신은 개경 저잣거리에 버려지게된다.
저잣거리에 버려진 기철의 시신은 그를 알아본 개경의 백성들에 의해 ‘주유소’ 당했는데
무솔리니의 시신은 몽둥이로 두들겨 팼지만 기철의 시신은 날로 능욕을 당했다.
기철의 죽음을 확인한 기황후는 고려에 영향력을 잃을까 두려워 최유를 시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원나라군 1만명으로 고려를 공격하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선주, 달천 전투에서 이들을 몰살시키며 단 17명만이 살아나간다. 더이상 원나라의 영향력이 고려에 미치지 못함을 확인사살하는 전쟁이였다.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파사부를 정복하며 마침내 자주국가화를 이룬 고려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요동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원말명초 군웅할거 시대의 요동에는 기철의 친아들인 기사인테무르가 요동의 군벌로 군림하고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원나라로 두고 이름도 원나라 식으로 가지고있었다.
기철을 제거한 후 고려에 악심을 품고있던 그를 두면 후일에 고려에 해가 되므로
지용수를 총대장으로 9만여명의 공요군을 편성해 요동성을 점령하고 기사인테무르를 요동에서 축출해낸다.
이로서 기자오의 후손, 기철일가는 고려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 재기와 부활
행주 기씨는 기철일가가 사라진 뒤 기철일가 에게 가담하지 않은 먼 친척 기필선의 후손들이 이어받게 된다.
조선 중기 기찬(奇襸)을 시작으로 문관으로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때는 기묘사화에 휘말려 피해를 입어 아래지방으로 잠시 이주하기도 했지만
조선 선조때, 퇴계 이황과 벌인 사단칠정논변의 기대승(奇大升)을 배출해내고 조선의 광국공신으로 선정되며 행주 기씨는 다시금 부활한다.
또한 광해군때는 기자헌(奇自獻)이 조선 영의정으로 오르며 조선 중기의 유력한 명문가가 된다.
출처: 한국 역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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